‘8월9일’ 손기정과 황영조, 놀라운 평행이론[그해 오늘]

입력시간 | 2022.08.09 오전 12:03:00
수정시간 | 2022.08.09 오전 8:04:50
  •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하고 고개 숙인 손기정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황영조 마라톤 우승으로 설분
  • 56년 전후 같은날 치른 경기서 완성한 한국 마라톤 드라마
[이데일리 전재욱 기자] 마라톤 영웅 손기정옹은 첫 풀 코스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1935년 도쿄메이지 신궁대회에서 2시간26분42초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인류 마라톤 사상 처음으로 2시간30분대에 진입한 기록이다. 당연히 세계 신기록이었다. 대회가 비공인인 탓에 공식 기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1936년 8월9일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주에서 역주하는 손기정(왼쪽) 옹과 1992년 8월9일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경주에서 결승선에 골인하는 황영조 선수.

이듬해 일본 올림픽대표 선수로 베를린 마라톤에 출전했다. 양정고등보통학교 동기 남승룡 선수도 함께였다. 둘은 조국을 잃은 탓에 가슴에 태극기 대신 일장기를 달았다. 한국인으로서 일본 대표에 선발된 것 자체가 실력을 대변한다. 일본도 일인을 올림픽에 출전시키고 싶었다. 오죽하면 변칙을 쓰면서까지 둘을 떨어뜨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선발 대회에서 끝까지 손 옹과 남 옹의 등을 바라보면서 뛰어야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수상대에 오른 손기정(가운데) 옹. 가슴의 일장기를 꽃으로 가렸다.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경기가 열린 1936년 8월9일. 손 옹이 우승했다. 한국인 최초로 딴 올림픽 메달이 금메달이었다. 기록은 2시간 29분 19초. 남 옹은 3위로 골인했다. 값진 동메달이었다. 그러나 메달은 일본에 돌아갔다. 두 사람이 나라를 잃은 터였다. 메달 시상대에 고개를 숙이고서 찍은 사진은 심정을 대변한다. 동아일보는 손 옹의 가슴에 일장기를 지운 채 신문을 발행했다 정간당했다. 한국이 올림픽에서 첫 금메달을 따는 데에는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레슬링 양정모)까지 40년이 걸렸다.

손 옹이 여한을 푼 것은 1992년 8월9일이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경기가 열린 날이다. 1위로 달리던 한국 마라톤 대표 황영조 선수가 막판 난코스 `몬주익 언덕`에서 치고 나갔다. 2위와 격차가 계속 벌어지기 시작했다. 결과는 황 선수 우승이었다. 손 옹이 금메달을 딴 56년 전 같은 날이었다. 공교롭게도 황 선수 뒤를 이어 일본인 선수가 2위로, 독일인 선수가 3위로 각각 시상대에 올랐다. 1936년 손 옹이 올림픽에서 우승할 당시 관여한 3개국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황영조(왼쪽) 선수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마라톤 우승을 차지한 이후 손기정 옹을 안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손 옹은 당시 동아일보에 보낸 기고문에서 `지난 56년간 나를 지탱해왔던 단 하나의 꿈이 바로 한국 마라톤의 올림픽 제패였다. (중략) 그리고 나는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보았다`고 했다. 감명은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끝나고 10년간 이어졌다. 2002년 11월15일 향년 90세로 눈을 감았다.
전재욱 기자imfew@e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