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데일리 이재은 기자] 위장 간첩 ‘무함마드 깐수’로 활동했다가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전향해 실크로드학 등 연구에 정진해온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전 단국대 교수)이 지난 24일 별세했다. 향년 91세.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사진=창비)

한국문명교류연구소는 정 소장이 지병을 앓던 중 입원 치료를 받다가 숨졌다고 지난 25일 밝혔다. 연구소 측은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며칠 전 입원해 계시다가 편히 가셨다”고 전했다.

1996년 7월 안기부에 검거돼 서울지검으로 이송되면서 기자들에게 간첩활동사실을 시인하는 당시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 (사진=연합뉴스)

1934년 중국 연변에서 태어난 정 소장은 베이징대학을 수석 졸업한 뒤 1955년 중국 국비연구생 신분으로 이집트 카이로대학에서 아랍어문학을 전공했다. 그는 1960년 모로코 주재 중국 대사관에서 활동했으며 튀니지에서는 연구원으로 활동하기도했다.

정 소장은 1963년 북한으로 귀화한 뒤 평양국제관계대학과 평양외국어대학 동방학부 교수를 지내며 김일성의 통역을 맡은 것으로 전해졌다.

외국어 능력이 뛰어났던 정 소장은 조선노동당 대외정보조사부 소속 대남공작원으로 선발됐고 1984년 ‘무함마드 깐수’ 이름의 아랍계 필리핀인으로 위장해 한국에 들어왔다. 이후 단국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으며 같은 대학 사학과 교수로 활동했다.

당시 그는 방송 출연 등을 비롯해 ‘신라·서역 교류사’를 집필하는 등 활발한 연구 작업을 이어갔으며 1996년 7월 서울의 한 호텔에서 북한대사관에 팩스를 보내던 중 국가안전기획부에 체포됐다. 고인은 국내 운동권 동향을 보고하는 등 대남공작 공로를 인정받아 북한에서 ‘조국통일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2000년 8월 15일 당시 공안사범으로 남파간첩 ‘깐수’로 알려진 정수일 전 단국대 교수가 대전교도소에서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뒤 민가협 회원들과 기자들에 둘러싸여 인터뷰하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이후 정 소장은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돼 사형을 구형받았으나 1998년 징역 12년을 확정받고 복역하던 중 2000년 광복절 특사로 출소했다. 그는 2003년 사면, 복권 과정을 거쳐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문명교류학과 실크로드학의 세계적 권위자였던 정 소장은 30여년간 ‘문명의 루트 실크로드’(2002) 등 20여권의 연구서를 집필하기도 했다.

그는 세계 4대 여행기인 ‘이븐 바투타 여행기’(2001)와 ‘왕오천축국전’(2004) 등을 번역하기도 했으며 지난해 11월까지도 학술대회에 참석해 기조 강연을 하며 활동을 이어간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