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이데일리 김은경 기자] 지난 4일 찾은 전남 여수 흥국상가 거리는 썰렁하다 못해 적막감이 감돌았다.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는 시간이었지만 넓은 대로변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진공 상태였으며, 상점들 사이로는 임대 스티커가 나붙어 있었다. 여수시 여천동 일대는 여수국가산업단지를 끼고 성장해 온 지역 상권의 중심지다. 하지만 최근 주요 석유화학 공장들이 잇따라 가동을 멈추면서 빠르게 쇠퇴해 벼랑 끝에 내몰렸다.

1999년부터 이곳에서 27년째 속옷 가게를 운영해 온 구재율 씨(56)는 “석유화학 공장이 돌아가야 사람들이 움직이고 손님도 오는데 당장 지금은 생활비도 벌기 어렵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4일 전남 여수 흥국상가 거리. 상점 곳곳이 공실로 남아 있다.(사진=김은경 기자)

이날 여천역에서 차로 20여 분 달려 도착한 LG화학 스티렌모노머(SM)공장 역시 오가는 차량 하나 없이 주변에 정적만이 감돌았다. 한때 스페셜티 제품인 고부가합성수지(ABS) 원료를 생산하기 위해 밤낮없이 돌아가던 이 공장은 지난해 5월부터 수익성 악화로 가동을 중단한 상태다. 인근 기업인 여천NCC도 조만간 연산 47만톤(t) 규모의 3공장 가동을 멈출 예정이다. 이들 공장을 중심으로 생계를 이어온 소상공인들은 생활고에 시달릴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다.

지역 상황이 이렇다 보니 청년 창업자들도 버티지 못하고 떠나고 있다. 정부의 창업 지원금을 받고 가게를 차렸다가 8개월도 못 버티고 나간 사례가 허다하다. 흥국상가와 함께 여수 도심 상권을 이루는 인근 상가들의 상황도 다르지 않다. 김미화 여수상인회 회장(49)은 “공단이 멈추니 인구는 빠지고 소비 심리는 얼어붙고 결국엔 사람들 발길도 뚝 끊겼다”고 하소연했다.

지난 4일 전남 여수국가산업단지 LG화학 SM공장. 해당 공장은 지난해 5월부터 가동이 중단된 상태다.(사진=김은경 기자)

여수산단은 충남 대산, 울산과 함께 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3대 축이다. 에틸렌 기준 연산 627만t으로 국가 전체 생산량의 절반을 책임져 온 대규모 단지다. LG화학, 롯데케미칼, 여천NCC, GS칼텍스 등이 밀집해 있으나 중국발 공급 과잉과 수요 침체 장기화로 지금은 하나둘 굴뚝 연기가 꺼지고 있다.

여수산단 주변은 석유화학 산업을 중심으로 수많은 생계가 촘촘히 연결돼 있다. 대기업 원청 노동자는 물론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제품을 포장하고 실어 나르는 화물차량 기사들, 자재를 납품하는 업체들, 신·증설 공사에 투입되던 건설 노동자들, 이들을 위한 숙소와 밥집, 주점과 편의점, 모든 것이 이 산단과 얽혀 있다. 이 때문에 ‘산단이 멈추면 도시 전체가 멈춘다’는 얘기가 과언이 아니다.

지난 4일 전남 여수국가산업단지 여천NCC공장 전경. 여천NCC는 조만간 3공장 가동 중단에 돌입할 예정이다.(사진=김은경 기자)

여수시는 이미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여수산단 내 4개 노동조합이 연대한 ‘석유화학산업 위기대응 여수산단 산별노조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지난 4월 출범해 정부와 기업에 공동 대응을 촉구하고 있다. 여수산단 58년 역사상 업종을 초월한 이 같은 연대는 처음 있는 일이다. 참여 조합원만 3만~3만5000명에 달한다. ‘직종은 달라도 닥친 위기감은 똑같다’는 게 이들의 공감대였다.

공대위에 따르면 석유화학 불황 탓에 신증설 공사는 자취를 감췄고 하루 평균 투입 건설 근로자 인원도 지난해 8000명에서 올해 2000명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내년 신규 공사 계획은 ‘제로(0)’다. 무선지구, 학동지구 등 노동자들이 머물던 곳은 이미 밤 9시 전에 간판불이 꺼지고 회식하던 대기업 직원들도 자취를 감췄다.

실제 여수산단 석유화학산업 플랜트 건설 발주액은 최근 1년 사이 78.4%나 감소했고 이에 따라 플랜트 건설업 종사자도 전년 대비 26.1% 줄었다. 지자체가 나서서 정부에 여수시를 고용위기지역으로 지정해 달라고 요구해 왔으나 일부 정량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위기지역 지정이 미뤄지고 있다.

지난 4일 전남 여수 흥국상가 거리. 빈 상가에 ‘임대’ 스티커가 붙어 있다.(사진=김은경 기자)

정부는 석유화학 산업 위기를 구조적인 문제로 보고 대규모 전환을 추진 중이다. 범용제품 생산을 줄이고 고부가 제품 중심으로 산업 구조를 개편하는 방향이다. 그러나 지역 사회에선 그 ‘전환기’를 버틸 힘조차 없다고 토로한다.

이광민 공대위 집행위원장은 “국가가 여수에 산업단지를 조성하면서 수많은 주민이 수산업 종사자에서 공단 노동자로 삶의 기반을 옮겼고 그 덕에 한국 경제는 반세기 넘게 성장할 수 있었다”며 “지역민의 희생과 헌신 위에 국가 산업이 세워졌다면 그 구조가 무너질 때도 정부는 응당 책임을 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위원장은 이어 “석유화학 산업 경쟁력 약화는 예견된 일이었고 이제는 정부가 서둘러 움직여야 할 때”라며 “지역 경제의 60%가 여수산단에 기대어 살아가는 현실을 감안해 임시방편이 아닌 근본적 대책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데일리 이미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