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은 보호하고 재판은 과학적으로…남달랐던 세종대왕②
- 계절별 '양옥·온옥' 설계…취약계층 구금 제한
- '신주무원록' 간행해 검시 등 법의학 체계화
- 사형 판결에 억울함 없도록 공정한 재판 강조
- '선입견 버리고, 부화뇌동 말라' 등 원칙 제시

지난 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세종국가경영연구원, 세종영릉봉향회 등 주최로 ‘청년 세종어진(御眞·왕의 초상화) 봉정식’이 열리고 있다, 이 초상화는 1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젊은 시절 세종대왕의 모습을 되살린 시도로 박철종 작가가 참여했다고 세종국가경영연구원은 밝혔다. (사진=연합뉴스)
[이데일리 성주원 기자] 세종대왕은 당시로서는 매우 선진적인 수인(옥에 갇힌 사람) 보호 정책을 시행했다. “감옥이란 죄 있는 자를 징계하기 위한 것이지, 무고한 백성을 침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라는 세종대왕의 신념은 다양한 정책으로 구현됐다.세종대왕은 감옥 환경 개선에 앞장섰다. 1426년에는 ‘옥도(獄圖, 감옥설계도)’를 배포해 남녀 죄수를 분리하고,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시원하고 바람이 잘 통하는 ‘양옥(凉獄)’, 겨울에는 따뜻하고 보온이 잘 되는 ‘온옥(溫獄)’을 설치하도록 했다. 또한 취약계층에 대한 특별한 보호 조치도 마련했는데, 70세 이상 노인과 15세 이하 어린이는 살인, 강도죄를 제외하고는 구금을 제한했으며, 여성과 임산부에 대해서도 특별한 법적 보호를 제공했다. 재판의 신속함도 중시해 ‘결옥일한(決獄日限, 형사사건 판결 기한)’을 설정함으로써 사형수에 대한 재판도 1개월 이상 지체되지 않도록 했다. 수인들의 복지에도 관심을 기울여 옥중에서 양식과 의복을 공급하고, 병든 죄수에게는 의원을 파견하는 등 인도적 대우를 보장했다.
세종대왕의 인권 보호 노력은 때로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휼형사상(恤刑思想)을 실천해 나갔다. 옥중의 고통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고통인 체옥(滯獄, 재판 지연으로 인한 장기 구금)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추위와 더위의 고충과 질병으로부터 죄수들을 보호하고자 해당 죄수들의 칼, 족쇄, 수갑 등을 자주 풀어주고 여름철 목욕과 청결, 겨울철의 보온에 힘썼다.
검시 거듭해 사인을 정확히 밝혀 살인자 적발
세종대왕은 법의학적 지식의 보급과 재판 활용을 중시했다. 1438년(세종 20년)에는 원나라의 왕여가 펴낸 ‘무원록’을 역주해 ‘신주무원록’을 간행했다. 이 책을 통해 세종대왕은 인명과 직결되는 검험(檢驗, 피해자의 시체를 검사하고 사망 원인을 밝혀 검안서를 쓰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정확한 검험을 바탕으로 살인자를 적발해 피해자와 그 가족의 억울함을 덜어주고자 했다.
세종은 인명과 관련된 공사 문서와 후일 증빙이 될 문서에는 반드시 날짜를 구체적으로 기록하도록 했으며, ‘시신을 검안하는 정식’을 따라 검시하도록 하고, 이과(吏科, 서리를 뽑기 위한 시험)와 율과(律科, 형률에 밝은 사람을 뽑기 위한 시험)의 시험과목으로도 정해 관료들에게 학습을 권장했다.
그러나 다수의 관료들이 구태의연한 방관자적 입장을 견지하자, 지방관들이 적극적이고 신중하게 백성의 재판에 임하도록, 형조에서 펴낸 ‘검시규식(檢屍規式)’을 중앙과 지방의 법을 담당한 관리들이 철저히 시행하도록 독려했다. 초검(初檢, 시체를 처음으로 검사하는 일), 복검(覆檢, 한 시체를 두 번째 검증하는 일)의 거듭된 별도의 검시 과정을 통해서 사인을 정확히 객관적으로 밝혀내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세종대왕의 노력은 이후 조선왕조 검험의 기본원칙이 됐으며, 영조와 정조 시대까지 계승됐다.
공정한 재판 후 엄정한 판결…권력자에 더 큰 책임 요구
세종대왕 시대의 사죄(死罪, 사형에 처할 수 있는 범죄) 판결 기록을 보면, 32년 재위 기간 동안 연평균 32건의 사죄 판결을 내렸다. 이는 정조 때(연평균 93건)보다 적은 수치지만, 세종이 사죄 사건에서 감형 판결을 내린 경우는 71건으로 13%에 불과했다. 반면 정조는 사형에 해당하는 전체 범죄 1112건 중 36명(3.2%)만 최종적으로 사형을 선고했고, 대부분 감형(44%)이나 석방(30.8%)했다.
특히 세종대왕은 공권력에 저항하거나 고위 공직자가 범죄를 저지른 경우에 더욱 엄중한 처벌을 내렸다. 권력자에게 더 큰 책임을 요구한 것이다. 범죄를 저지른 후 체포를 거부한 이준경, 김독동 등이나 체포에 항거하다 살인한 사노 와도처럼 공권력에 저항한 경우 대부분 참형에 처해졌다. 세종대왕의 이러한 엄정한 접근은 억울함 없는 공정한 재판 과정을 전제로 한 것이었으며, 법 앞의 평등을 실현하려는 노력이었다.
“다방면으로 따져보고 구해낼 방도를 찾으라”
세종대왕이 1431년 반포한 ‘법 맡은 관리가 지켜야 할 원칙’은 오늘날 법조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가르침을 준다. 그는 재판관들에게 자기 의견에 구애되지 말고, 선입된 말에 묶이지 말며, 남들을 따라 부화뇌동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또한 옛날 방식에 얽매이지 말고, 죄수의 쉬운 자백을 기뻐하지 말며, 판결서를 서두르지 말라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다방면으로 사안을 따져보고 되풀이해서 구해낼 방도를 찾으라는 지혜는 현대 법조인들이 심사숙고해야 할 원칙이다.
이러한 세종대왕의 법률 정신은 세기를 뛰어넘어 현대 사법 체계에도 여전히 중요한 지침이 되고 있다.
법전 편찬 등 법제도의 체계적 정비
세종대왕은 법전 편찬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는 1422년 ‘속육전(續六典)’의 편찬을 위한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을 설치해 법전 편찬에 착수했다. 1433년에는 ‘경제속육전’을 완성했다. 이 과정에서 법령을 영구히 준수할 전(典)과 그렇지 않은 록(錄)으로 구분하는 ‘전·록’ 구분 원칙을 확립했다.
또한 중국의 주석서를 참고해 우리 고유의 주석서인 ‘대명률강해(大明律講解)’를 편찬하고, 외래 형률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적용했다. 세종대왕은 기계적 적용이 아닌 조선의 현실을 고려한 법제 구축에 힘썼으며, 다양한 법원(法源)을 동원해 당시 조선사회와 법감정에 합당한 법제를 구축했다.

세종대왕 탄신일을 하루 앞둔 14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앞에 꽃들이 놓여 있다. (사진=이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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